밤바다, 불꽃놀이
Written by tian @tianlee_CMS
For HIREEN @HR___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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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쟝 올슨 X 범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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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도박의 연속과 같다.
이런 마음가짐은 범희서가 지닌 갬블러의 재능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겠는가. 모든 선택은 예측되는 결과가 있지만 100%의 확률이지는 못했고, 늘 예상치 못한 요소가 결말을 뒤틀기도 했으며, 아주 약간의 희망을 위해 얼토당토않을 가능성에 목숨을 걸게 되지 않는가. 오늘은 날씨가 좋을지 맑을지, 우산을 챙길지 챙기지 않을지, 반소매를 입을지 원피스를 입을지…. 결국 모든 선택은 도박이다. 그리고 희서는 타고난 도박꾼이었다.
"쟝, 준비 다 됐어?"
"…응."
뺨을 쓰다듬는 바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태양, 만연한 꽃의 향기가 후덥지근한 공기와 뒤섞여 후각을 자극한다. 하늘색 체크 무늬 원피스와 얇은 갈색 카디건이 나부끼며 잿빛 아스팔트 위에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지, 새카만 머리카락은 금빛 띠는 갈색이 되어 흰 피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아무리 뜨거운 열기가 숨통을 조여도 그녀를 본다면 찰나의 시원함이 폐에 스며드리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희서의 시선을 차마 맞추지 못하고, 쟝은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래 기다렸어? 한 박자 뒤늦게 붙인 질문에는 그 특유의 상냥함이 물씬 풍겼다. 행여 햇빛이 눈을 찌를까, 쟝은 손갓을 만들어 희서의 머리 조금 위에 들어주었다. 네모난 그늘이 동그란 얼굴을 덮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준다. 분홍색 눈동자가 반달처럼 접히며 눈가에 기쁨을 새겨넣었다. 오래 안 기다렸어. 어서 가자, 쟝. 기껏 햇볕을 막던 손은 무력하게 끌어내려지고, 그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에 저항하지 못하고 벌어진다. 한 마디 이상 손가락이 더 긴 쪽은 쟝인데도, 그는 늘 끌려다니는 쪽이었다.
쟝은 희서에게 보장된 승리와도 같았다. 양면에 똑같은 무늬가 새겨진 동전이라던가, 뒷면만으로 앞면을 알 수 있는 트럼프 카드, 소매 속에 숨겨진 조커, 숫자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룰렛 같은 존재 말이다. 그러나 손을 뻗는다면 잡아주고, 원한다면 내어주고, 앞서간다면 따라와 주었다. 그리고 예측 불가인 결과와 불확실성으로 정의된 도박판에서 이런 일정함은 도박이 아니게 되었다. 견고하게 바뀌지 않을 법칙, 기댈 수 있는 룰, 하나의 선이 되어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기대치가 되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닌, 늘 옳을 수밖에 없는 기준이 되어 그녀의 삶의 중심을 꿰찼다. 아마 뭇 사람들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까. 이런 묵직하고 단단한 감정이 어떻게 단 두 단어로 응축되어 혀 위를 가볍게 굴러다니는지. 희서는 사랑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모호한 틀에 욱여넣으려 했던 어른처럼, 그들의 관계를 타인이 정의한 단어에 억지로 맞추고 싶지 않았다. 휘감은 쟝의 손에 지그시 힘을 더하고, 그를 향해 웃었다. 목적지가 곧이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너머 찬란한 푸르름이 차오른다. 새파란 하늘과 일렁이는 바다를 구분하는 것은 흰 파도뿐이라서, 이대로 물결에 몸을 맡기면 저 높은 구름까지 헤엄쳐 올라갈 수 있을 듯싶었다. 딱딱한 도로에 점차 금이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모래 알갱이들이 발아래서 허물어지며 그들을 지지했다. 참을성 없이 신발 속으로 굴러들어오는 몇몇 장난꾸러기들 때문에, 쟝과 희서는 얼마 가지 않아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한 손에는 신발을 달랑달랑 들고,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서로를 붙든 채로. 데워진 모래는 따뜻하게 발바닥에 달라붙었지만 뜨거울 정도는 아니었으며, 과하게 열이 쌓일 때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결이 피부를 식혀주었다. 기분 좋다, 희서는 콧노래 섞인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안 그래, 쟝? 휘어진 눈동자가 다시금 제 옆의 청년을 향한다. 그는 역시 고개를 숙이며 동의를 내뱉었다. 나도 좋아. 싫을 리가 없잖아. 물론… 이보다 더 들어가는 건 조금 부담스럽지만.
짤막한 침묵을 즐기며, 그들은 묵묵히 해변과 바다의 경계에 제 발자국을 남겼다. 하나, 둘, 세 걸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발자국들. 이후 이곳에 다시 와서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도, 해변은 그게 첫 발자국인 것처럼 뻔뻔하게 반짝일 터이다. 그랬다가 다시 파도가 일면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이고, 모래알이 쓸어내려지고, 다시금 깨끗하게 지워지겠지. 시간만 주어진다면, 결국 이 세계에 제대로 남는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아주 먼 미래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어차피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모두 조금 더 뻔뻔하게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조금 더 멋대로, 행복하게, 솔직하게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희서는 쟝을 모래사장 쪽으로 잡아끌었다. 모래성 만들고 싶다 했었잖아. 엄청나게 큰 모래성을 같이 쌓자, 쟝. 소라랑 조개도 주워서 장식하자. 분명 근사한 모래성이 될 거야.
무너지는 모래알을 물을 끼얹으며 질펀한 반죽을 만들고, 엉성하게라도 벽을 쌓으며 얼추 성을 만들어갔다. 기관에서는 왜 모래성 만드는 법은 안 가르쳐줬는지 몰라. 생각해보면 가르쳐준 게 정말 적다, 안 그래? 낭랑한 웃음과 어렴풋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모래성은 자꾸만 쓰러지고, 또 망가졌다. 만약에 평범한 학교에 갔더라면, 평범하게 지구에서 지냈더라면 그들은 모래성을 조금 더 잘 쌓을 수 있었을까. 조금 더 일찍 바다에 도착하여 그 반짝임에 감탄하고, 순수한 무지로 피부가 붉게 타버릴 때까지 태양 아래서 뛰놀았을까. 조금 더 쉽게 행복해지고, 더 자주 즐거울 수 있었을까? 툭, 희서의 머리가 쟝의 어깨에 기댄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팔이 곧바로 굳으며 안정적으로 희서를 지탱한다. 혹시나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그녀가 넘어질까, 거친 모래 알갱이에 다리가 따갑게 쓸리진 않을까. 고작 한 사람의 체온이 햇볕보다 더 뜨거울 리 없는데도, 머리 위로 내리쬐는 열기보다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엉망인 모래성을 앞에 두고, 그들은 한참 동안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해의 줄기가 지평선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릴 때쯤에야 모래성은 완성되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위태롭고 서투른 성이었지만, 크기만큼은 근사하게 컸으며 이곳저곳에 박힌 조개가 꽤 앙증맞은 느낌을 더해주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제대로 만들 수 있겠지? 낙관적인 질문에 무난한 답이 되돌아왔다.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텅 빈 모래사장에 너털웃음이 울리고, 희서는 다시금 쟝의 손을 잡았다. 밤바다도 근사하대. 다음번에는 밤에 오자, 쟝. 불꽃놀이도 가져오자. 그때도 분명 즐거울 거야. 쟝의 손가락이 그녀의 마디를 상냥하게 쥐었다. 그래, 그러자. 바람이 낚아챈 속삭임은 희서의 마음을 다정하게 간질였다.
갔던 일을 똑같이 돌아가는 대신, 희서는 방향을 틀어 또다른 익숙한 길로 그들을 이끌었다. 영영 열리지 않을 듯했던 문을 열고, 어렸을 때는 까마득하게 가팔랐던 계단을 밟아 높게, 더 높게 올라갔다. 공기는 케케묵은 먼지 맛이 났음에도 텁텁하진 않았고, 행성 이주 프로젝트가 끝난 지 꽤 되었음에도 곳곳에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이곳에 종종 들르는 사람은 아마 그들이 처음이 아니란 의미이리라. 계단의 끝에 다다라 철문을 열면, 지평선을 반쯤 넘은 태양이 콧등에 입을 맞춰주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뻗은 해바라기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추었고, 길쭉한 팔을 서로에게 비비며 잔잔한 환영 인사를 건네주었다. 우리의 새로운 터전 역시 멸망하더라도, 다시금 황폐한 바람이 불어오고 메마른 대지가 갈라진다고 하여도, 해바라기만큼은 이곳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지 않을까. 언젠가 꽃이 시들고 굵은 줄기가 굽어져도 씨앗만큼은 널리 퍼져,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파헤치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금 피어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는 것은 멍청할까? 비록 사라져도 언젠가 다시 태어난다고, 진정한 끝은 없다고. 그때 피는 해바라기와 지금 핀 해바라기는 같은 꽃이 아니겠지만, 똑같이 태양을 바라보고 발꿈치를 들지 않을까. 연약한 꽃잎이 찢어지지 않도록, 희서는 조심스럽게 꽃을 엄지로 문질렀다. 잘 보살펴주고 있구나. 씨앗들을 건네준 게 아주 오래전 일 같은데도, 쟝은 여전히….
"있잖아, 쟝, 오늘 행복했어?"
즐겁다, 와 행복하다는 엄연히 다른 질문이다. 잔뜩 웃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딱히 즐겁지 않더라도 잔잔한 행복에 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쟝은 늘 그러하였듯 신중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답을 고려하고 내뱉었다.
"응, 행복했어."
"멋대로 너를 옥상까지 끌고 왔는데, 괜찮아?"
"이제는 괜찮아."
해바라기밭 너머 쟝을 시선에 담는다. 샛노란 꽃잎이 해를 향해 활짝 개화하듯, 쟝은 늘 희서를 향해 제 속내를 드러냈다. 하늘처럼 푸른 시선으로, 온전한 신뢰를 머금고서 그 안에 그녀를 담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곱슬 머리카락이 그의 눈가를 다정하게 감싸고, 양쪽에 축 늘어진 팔에서 평온함이 묻어나온다. 다행이야, 희서는 입꼬리를 빙그레 휘며 속삭였다.
"있잖아, 나도 오늘 행복했어. 정말 많이. 그리고 너와 함께, 이런 행복한 기억을 더 잔뜩 만들고 싶어."
사랑이라 말하기엔 이 감정이 너무 깊고 복잡해서, 희서는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방법으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내기에는 늘 판돈이 걸리는 법, 그 판이 클수록 판돈 역시 더욱 귀한 게 걸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희서는 제 미래를 내놓았다.
"과거에 널 아프게 한 게 있다면 이제는 괜찮은지 물어보고, 우리 둘 다 몰랐던 각자의 호불호를 알아가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언제부터일지 모르는 과거부터 널 좋아하게 되었어. 내 곁을 채운 온기가 떠나길 원치 않아. 너의 시선의 끝에는 항상 내가 있으면 좋겠다. 이 도박의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두려움 하나 없이 기꺼이 뛰어들 거야.
과연 너는 내 도박에 응해줄까.
쟝은 희서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평생 자신이 쟝이라 불려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쟝 올슨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자신은 그의 조잡한 그림자가 아닐까 - 하는 질문은, 떨쳐낼 수 없는 의문이 되어 그를 따라다닐 터였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쟝'이 무엇을 알지 고민했다. 쟝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과 동시에, 오로지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했다. 기억도, 소지품도, 이름도 제 것이라고 주장할 게 하나 없어 그는 가짜의 삶을 평생 살 운명일 듯했다.
선물이라며 내민 곰 인형과 해바라기 씨앗을 보았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나. 손바닥을 채우는 명확한 감각에 안도를 느꼈나. 쟝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그제야 두 발을 땅에 딛고 비로소 태어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혼란과 두려움을 뚫고 차오르는 기쁨 역시 자신의 소유라서, 죽어버린 쟝 올슨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낚아챌 수 없는 감정이라, 자신이 살아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안에 심어진 쟝 올슨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평생을 가짜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 역시 쟝 올슨이 아닌가. 희서가 그를 그리 불러주지 않았는가.
마침내 얻게 된 숨이 너무나도 달가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도 있었다. 쟝 올슨이 되어도 습관처럼 심어진 망설임과 두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아, 그는 매 순간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곱씹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쉬이 고민하지 않을 일도 그에게는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죽지 않은 쟝 올슨이라면 서슴없이 결정했을 일조차도 그에게는 고된 갈등이 생기었다. 결국, 쟝 올슨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그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다른 삶의 방식을 몰랐기에, 쟝은 변하지 못했다.
옥상에 서서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잔여의 기억이 칼날처럼 그를 꿰뚫었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끝으로 더듬으면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떤 날은 누가 그를 뒤에서 미는 듯했고, 또 어떤 날은 깜빡 조는 그의 목이 졸렸다.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뜨면, 노란 해바라기가 잔잔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쟝 올슨은 죽었다. 쟝 올슨은 살아있다. 희서는 그에게 곰 인형과 해바라기 씨를 주었다. 그는 그렇게 존재했다.
어느 날, 희서가 그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목마르지, 쟝? 선뜻 마시지 못하고 한참 투명한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말랐다. 희서가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는데도, 과거의 망령은 지독하게 그를 따라다니며 불신을 귀에 속삭였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머뭇대는 그를 향해 희서가 웃었다. 괜찮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컵을 도로 가져갔다. 고개가 뒤로 젖히고 목울대가 울렁이며 물을 삼킨다. 봐봐, 이제 괜찮지? 그제야 쟝은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은 맑고 시원했다.
어느 순간부터 타인이 주는 음식을 망설이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씹고 삼킬 때마다 약간의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일렁거렸지만, 이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지구로 돌아갈지, 베타라이카에 머물지 결정하는 순간에 그는 더이상 과거의 쟝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희서에 곁에 머물고 싶었기에, 그녀를 따라 베타라이카를 택했다. 불꽃놀이에 가고, 같이 시장에 가고, 온종일 TV를 보며 쉬기도 했다. 희서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가만히 듣기도 하고, 그녀를 따라 간단한 도박을 배워보려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바다로 향했다. 시야의 끝까지 쭉 뻗은 지평선을 보니, 시원함보다는 겁이 먼저 났다. 저 끝에 가면 무엇이 있을지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바다에 발을 담가도 언제 파도가 휩쓸릴지 몰라, 아주 깊은 바닷속에는 어떤 풍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그런데도 즐거웠다. 희서와 손와 맞잡고, 따사로운 햇볕 아래 달궈진 모래를 밟는 일상이 행복했다. 엉성한 모래성을 지어도, 선스크린을 깜빡해 피부가 따가워도, 당장 다음 순간에 희서가 그를 어디로 이끄는지 몰라도, 괜찮았다. 옥상에 다다라 해바라기들을 바라보며, 그 중심에 선 희서를 바라보며, 쟝은 생각했다. 이대로 살고 싶다고. 나는 욕심이 난다고, 더 행복해지고 싶다고. 이것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감정이라, 투명하고 명백한 나의 욕망이라. 네가 나에게 욕심을 심어주었듯이 나는 너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 너로 인해 미래를 그리게 된 나는 너에게 우리의 과거를 선물하고 싶다. 이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너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고, 그러니 네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그저 쟝 올슨의 흔적을 지우기 급급했던 나는, 너라는 흔적을 나의 삶에 온전히 남기고 싶다고.
쟝은 희서의 손을 잡았다.
"평생이 걸려도, 괜찮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도, 모든 게 덧없이 흩어질 찰나라고 하여도, 우리는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맞잡은 손의 온기를 기억하고, 비 오는 날 젖은 머리카락의 축축함을 기억하고, 옥상에서 나눈 입맞춤의 열기를 기억할 것이다. 희서는 쟝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괜찮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정의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자. 언젠가 한 줌 흙이 되어도, 이 사랑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불변의 진실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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