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Dice
Written by tian @tianlee_CMS For HIREEN @HR CM
Story of 쟝 올슨 X 범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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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유통기한이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할수록 더 빨리 닳는 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즐겨 입는 옷이 제일 빨리 낡아버리는 것처럼, 제일 자주 쓰는 공책이 제일 먼저 동나는 것처럼. 사랑할수록 소모 되고, 그만큼 빨리 떠나보내야 한다는 잔인한 법칙은 도대체 누가 정했는지. 그런 법칙은 차라리 없는 게 좋았을 텐데 말이다.
쟝 올슨은 두려웠다. 그가 범희서를 사랑했기에, 그만큼 더 빨리 그녀를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녀를 사랑하여 더욱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이별 이 더욱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려했다. 자신에게 기대 새근 새근 잠든 그녀를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그의 귀를 두드린다. 쟝은 눈을 감았다. 희서는 살아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시체로 변하고, 이웃과 친구, 가족 과 연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지구를 버린 신의 벌이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디 어스 행성 이주 계획의 실패를 대비하여 개발했던 말살 프로그램이 오작동으로 켜진 것이라 말했다. 어떤 이들은 베타라이카에 잠 복해 있던, 그러나 그들이 미처 몰랐던 병균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이들은 지구가 앙심을 품고 바이러스를 살포한 것이라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가 입을 모아 말했다. 이것은 재난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존재 들의 이름을 따, 그들은 저 생명체들을 ‘좀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들을 기적적으로 다른 행성에 옮길 우주선도, 시간도 없었다.
범희서는, 처음에는 그저 억울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겨우 평화롭게 살려고 했더니 이런 재앙이 찾아오는 게 너무나도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 러나 일주일이 흐르고, 한 달 동안 생존하고, 이내 석 달을 인터넷과 전기 없이 견디니 이 역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했다. 어 찌 되었든 나아가야 했다. 쟝과 함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택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던 그들은 이내 식량이 떨어지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 다. 마트와 편의점이 동나고 인기척이라고는 좀비의 신음만이 전부가 되자 그들은 여행을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도, 길도 불분명한 그런 여행을 말이다.
사람들이 어딘가 방공호를 지었을지도 몰라, 희서는 그리 희망을 품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좀비에 대항할 방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설득에 쟝은 손쉽게 짐을 쌌다. 희서의 고집은 어마어마해서 한 번 마음 먹 은 일은 꼭 해냈으며, 애초에 그녀의 바람에 거스르고 싶은 욕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무작정 제일 가까인 마을로 향했다. GPS와 인터 넷 검색을 쓰는 시대에 종이 지도는 찾을 수 없었기에, 온전히 기억에 의지 하여 길을 밟았다.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낮에는 비교적 한산한 건물을 찾아 몸을 뉘었고, 고요해진 밤이 되면 달빛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소방 용 도끼와 크로우바를 따라 손에 굳은살이 생겼고, 어느새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무게가 되었다. 음식은 딱 굶지 않을 정도로 구할 수 있었다. 진 열대에 남겨진 음식은 그저 챙겨갈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혹은 이곳을 들를 누군가를 위한 것인지. 어느 쪽인지 알 도리는 없었으나 쟝과 희서 역시 소량의 식량을 늘 남겨두며 움직였다. 언젠가 그들과 같은 길을 밟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있기나 할까?”
옷가지로 대충 만든 잠자리 위에서 쟝은 문득 속삭였다. 집을 나온 지 꼭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그들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생존자의 흔 적 역시 찾지 못했다. 어느새 가을의 서늘함이 낮까지 침범하여, 새우잠이 퍽 익숙해졌다. 그의 품에 안긴 희서는 짧은 침음을 흘렸다. 흐음, 있으면 좋겠어. 우리 둘만 살아남기에는 어려우니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모로 더 쉬울 테고. 그러니까 있자고 믿자. 난 운이 좋은 편이니까, 분 명 있을 거야.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쪽, 소리가 그의 뺨에 붙었다가 떨어진다. 무서워, 쟝? 분홍색 눈동자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빛 아래 불꽃처럼 일 렁였다. 너무 빛이 밝으면 잠들이 어려워할 텐데, 그는 그런 공연한 걱정을 하며 희서의 눈가를 손으로 가려주었다. 손바닥이 대지를 덮는 찬란함을 덮 을 수 없겠으나, 고작 한 뼘 정도 되는 그늘을 드리워 주겠다고. 무섭지 않아, 그는 조용히 답했다. 너만 안전하다면 난 괜찮아.
여섯째 되는 날, 그들은 옆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의 동네와 사정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생존에 익숙한 그들은 이제 제법 능숙하게 좀비에게 서 몸을 숨기며 이동했다. 약국에서 쓸만한 약품을 찾고, 마트와 편의점에 서 생수와 식량을 구했다. 쟝이 굴러떨어진 통조림 하나를 줍기 위해 계산 대 아래로 기어서 들어갔을 때, 희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쟝, 이리 와 봐! 이것 좀 봐! 허겁지겁 일어나다 뒤통수가 그만 계산대에 쿵, 받 쳤다. 비명도 못 지르고 얼얼한 머리를 벅벅 문지른 쟝은 서둘러 제 연인의 부름을 따라갔다. 희서의 손전등이 종이가 덕지덕지 붙은 벽을 가리켰다. 처음 마트에 들어왔을 때는 쓰러진 진열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다. 지도를 조각조각 출력하여 퍼즐처럼 맞춘 모양새였다. 마을 이름에 별 표가 그려져 있었고, 조금 떨어진 장소에 동그라미가 여럿 그어져 있었다.
“누군가 여기 흔적을 남기고 갔어. 우리 말고 생존자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아마 저기, 동그라미 친 곳으로 향했겠지? 저기에 생존자의 마을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뭐랬어, 쟝. 난 운이 좋다니까.”
여기가 우리가 지내던 곳이니까, 이 도로를 따라 쭉 올라온 거지. 중간에 길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어. 저기까지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려나. 우리가 온 길의 두 배쯤 되니까, 쉬지 않고 움직이면 이 주 정도 걸릴 것 같아. 먼 지로 까맣게 물든 손끝이 종이를 더듬는다. 이번에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종이를 한참 동안 어루만지던 손이 이윽고 쟝을 향했다. 그의 손을 그러쥐고 온기에 손 가락을 얽는다. 이번에는 널 잃지 않을 거야. 이번에도 너를 놓치지 않을 거 야. 결연한 다짐이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쟝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희서를 밀쳐내고 도끼를 두 손으로 움켜쥐 었다.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 도끼날은 바닥에 쾅, 박히고 말았다. 쟝 은 입술을 꽉 깨물며 올라오는 신음을 참았다. 축축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발목을 움켜쥔다. 쟝! 희서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내려놓았 던 크로우바를 뒤늦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진열장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 다. 좀비를 공격하려면 빙 돌아가야 할 테고, 그때쯤이면 오히려 도움보다 는 방해가 될 확률이 높았다. 쟝이 도끼를 빼내려 발버둥 쳤으나 단단하게 박힌 날은 도통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던졌다. 쾅, 진열대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요란하게 맞부닥친다. 쿵, 묵직한 쇳덩이 아래 좀비는 낡은 인형처럼 으깨졌다. 동시에 쟝 역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왼발은 진열장의 그림자 아래 숨겨져 보이지 않았다.
“쟝! 다리가…. 기다려, 내가 도와줄게.”
희서가 넘어진 진열장에 무게를 싣자, 쟝이 제 다리를 붙들고 밖으로 질질 끌어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겨우 만들어졌다. 바지 아래 퉁퉁 부어오른 발목은 얼핏 보기에도 고통스러웠다. 어떡해, 입을 틀어막고 속삭이던 희서는 이를 악물고 붕대와 약을 끄집어냈다. 울고 안타까워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그들에겐 늘 시간이 부족했다. 놀랄 시간, 슬퍼할 시간, 쉴 시간까 지. 여기서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면 소란을 들은 다른 좀비들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부목으로 삼을 만한 물건을 찾지 못한 그녀는 크로우바를 그의 발목에 대고 붕대로 단단하게 묶어놓았다. 무기가 없는 건 아쉬웠지만, 쟝의 부상이 먼저였다.
쟝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희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통 때문에 머리가 쿵쿵 울렸고, 얼얼한 다리는 제 일부가 아닌 것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치료된 제 다리를 바라보던 그는 눈동자를 굴려 벽의 지 도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저곳까지 가자. 그는 낯선 마을의 이름을 입안에 서 굴렸다. 저곳까지 희서를 데려가야 해. 멀쩡한 몸이어도 생존을 확신할 수 없는 이곳에서, 부상자와 여자 한 명이 함께 버틸 확률은 희박했다. 아무리 그녀가 운이 좋더라도.
그들은 구석에서 찾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지도를 찍었다. 한 장으로 담 기에는 지나치게 컸지만, 네 장으로 나눠 모으니 얼추 분간할 수는 있게 되 었다. 서로에게 기대 그들은 절뚝절뚝 걸어갔다.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
쟝은 늘 죽음을 두려워했다. 딱히 살고 싶다는 열렬한 갈망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의미도 아니었기에. 죽음이 머금은 타인의 악의와 이기심이 무서웠다. 한 생명을 기꺼이 바스러뜨리려면 얼마나 절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저 좀비들도 누군가의 악의인가? 어쩌면 인류를 향한 이 세상의 분노일지도 몰랐다. 쓰러진 나무 기둥에 걸터앉은 그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여전히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오른 발목은 도통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뼈는 알아서 붙을 것이다. 올곧지 않거나 조금 뒤틀려 붙더라도, 어떻게든 나을 것이다. 볼록 튀어나온 근육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이내 그 아래를 더듬었다. 선명한 잇자국이 그의 피부에 각인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그의 발목을 꿰뚫었을 때, 그는 어떠한 세상의 종말을 직감했다. 이 세상이 아니라, 무너지고 썩어가는 베타라이카가 아니라, 해바 라기 꽃과 태양으로 이루어진 어느 세상의. 옥상에서 내려다보던 풍경과 따 끈한 여름의 열기, 그 속의 맑은 향기와 가끔 들려오던 노랫소리로 이루어 진 작은 낙원의 멸망을. 도끼를 휘두르면서도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좀비의 뇌를 깨부수고 잘게 다져도 이미 근육과 혈관으로 침투한 바이러스 를 빼낼 순 없었다. 발목 위로 부목을 대는 희서를 보며 다행이란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가 절뚝거리는 이유는, 발목이 물어 뜯겨서가 아니라 부러져서다. 그의 안색이 나빠진다면, 아마도 부러진 뼈가 염증을 일으킨 탓이 될 터이다. 적어도, 범희서에게는.
오만이며 욕심임은 알고 있었다. 잠복기도, 증상의 악화도 예측할 수 없 었다. 당장 내일 돌변하여 희서를 공격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쟝은 희서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반발할 게 뻔히 보였거니와, 이 주가 걸리는 거리를 홀로 여행하는 일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동그라미 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쟝은 자기 자신과 그리 약속했다. 그때까지만 희서를 지키면서 움직이자고. 그곳에 도달하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녀를 보내주자고.
안전을 고집하며 일부러 도심에서 멀어져 빙 돌아가는 숲길을 택했다. 때로,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날에는, 보초를 서는 대신 서로를 부둥켜안고 몸 을 뉘었다. 서로의 온기와 숨결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위안으로 삼았다. 해바라기도, 아끼던 곰 인형도 없지만, 목숨만큼은 아직 붙어있다. 그 사실일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그들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이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쟝은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다가,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살당한다거나, 그럴 순 없는 것일까.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허황한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굴린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그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했다.
“쟝, 뭐 해? 조금 더 쉴까?”
“아니야, 괜찮아. 해 뜨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지. 목적지가 곧이잖아.”
허겁지겁 다시 붕대를 동여매고 몸을 일으켰다. 힘들면 더 쉬어도 돼, 쟝 의 상태가 제일 중요하니까. 희서는 그에게 잰걸음으로 걸어오며 팔을 약하 게 붙잡았다. 팔에 맞닿는 따스함에 쟝은 무심코 움찔,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손을 뻗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희서에게 차마 닿을 수 없었다. 예전처럼 행동하다가 무심코 그녀까지 감염시킬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아. 빨리 가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욱신욱신, 다리를 휘감는 통증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희서는 어리둥절한 듯 그를 바라보더니, 개의치 않고 그의 발걸음을 맞추며 나란히 걸어갔다. 흐릿한 손전등 불빛과 바람이 실어오는 소리에 기대 길을 걸어가던 중, 그녀는 문득 대화를 시도했다.
“나, 이런 숲이 있는 줄도 몰랐어. 버스 타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마을에서 나온 적이 드무니까, 아무래도.”
“이렇게 되기 전에 왔어도 좋았을 텐데. 지난번 마을도, 분명 그때랑은 다르게 근사한 동네였겠지?”
“…이게 끝나면, 그때 여행 다니자.”
어디든? 희서는 말갛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어디든. 쟝은 덤덤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높게 세운 벽과 모락모 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연기라! 연기가 있다는 것은 불을 지폈다는 의미고, 전기가 다 끊긴 지금 시점에서 불은 문명을 의미했다. 저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인지, 몇 명인지는 몰라도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그러니,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가, 범희서. 가서 살아남아.”
쟝?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천천히 다시 제 붕대를 풀고 바지를 끌어 올렸다. 손전등의 흰 불빛마저 거뭇한 피부를 창백하게 물들여주진 못했다. 미안해, 속여서. 그는 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 마트에서, 물려버렸어….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여기까지 함께했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가, 희서야.
“언젠가는 해독제가 만들어질 거고, 언젠가는 모두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릴게.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때 가 오면…. 다시 찾아와 줘.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도박을 잘하니까, 너에게 나를 걸고 싶어. 그러니까 살아남아, 범희서. 살아서… 나를 구해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게 죽음이 아니라는 확신과 신뢰가 있어서일까. 그의 희서라면 돌아올 것이라 확신해서 울음이 나지 않는 것일까. 혹은 그녀에게 눈물 한 방울만큼의 설움을 얹어줄 수 없어서, 그래서 입꼬리를 비 틀어 올리고 이리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쟝을 꿰뚫는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 혹은 왜 그런 말을 해, 온갖 의문과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지만 정작 나오는 것은 공허한 숨결뿐이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터트렸다. 쟝이 흘리지 않은 몫까지 두 뺨 위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안 가. 너 없이 내가 왜 가? 난, 나는 쟝 너랑 같이 살고 싶은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못 가.”
“같이 살 수 있어. 너만 살아남는다면, 같이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이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면 안 될까.”
짭조름한 눈물이 희서의 소매를 축축하게 적셨다. 벅벅 눈가를 문지른 그 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뿌리칠 새도 없이 바짝 다 가와 그의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본다. 한쪽 다리로 어중간하게 서 있던 쟝 은 그녀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희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원래 이 주 동안 걸어야 도착했을 거리였다. 쟝의 부상으로 인해 꼬박 삼 주가 걸려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와중에도 그곳에 가면 의사라던가, 약이라 던가, 무엇이든 더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럼 쟝도 나을 수 있다고, 부러진 발 목쯤이야 말끔하게 나을 수 있을 거라며 낙관을 고집했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지 감히 가늠도 못하고 말이다. 상처가 곪고, 어긋난 뼈 위에 무게를 실을 때마다 무척 고통스러웠을 텐데.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힘겹게 웃었을 것이다. 희서의 손이 쟝의 양 뺨을 감쌌다. 열 때문인지, 그의 피부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이미 그는 살면서 충분히 눈물을 흘렸는데. 고통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말 만큼 행복만 맛보여주고 싶 었다. 두번 다시 이런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그를 보호하고 싶었다. 정작 그가 자신을 감싸 안고 지켜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싫어, 쟝. 나는 너랑 함께 있을 거야. 우리, 지금 여행하자. 그동안 못 했 던 여행, 나중에 말고 지금 하자. 돌아다니다 보면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다른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같이 살자. 그녀는 그렇게 속삭이며 쟝을 끌어안았다. 나에게 너를 건다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나는 운이 좋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방법을 찾을 거야. 널 잃지 않을 거야. 인생은 도박이다. 때로는 가진 모든 것을 걸 어야 승리를 쥘 수 있는 법이다. 어차피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면, 차라리 나 를 내걸어 너를 쟁취하겠노라 희서는 생각했다. 어차피 너를 놓아야 한다면, 나의 행운을 모두 쏟아부어도 좋으니 너만을 다시 움켜쥐겠다고. 그가 쓰게 웃으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바뀌는 것들이 두려워. 그 무엇도 영원하 지 않는다는 게 무서워. 그렇다면 자신이 그의 불변하는 존재가 되리라. 언 제나, 어떻게든 곁에 머물고 마리라. 삶은 선택과 확률의 연속이니 이 역시 거대한 도박이 아닌가. 도박판 위에 자기 자신과 인생까지 내거는 일은 전에도 한 번 겪지 않았나. 다시 한번 반복할 뿐이다.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제 행운을, 그리고 쟝을 믿고 있기에.
품에 안긴 희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대로 밀쳐내야 하는데, 차라리 다리를 절뚝거리며 도망쳐야 하는데, 쟝은 희서를 마주 끌어안고 말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더 이른 이별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을 이 세 상에서 더욱 빨리 소모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는 희서를 품에 안았다. 그 역시 희서와 함께 살고 싶었던 탓이다. 외면하고 부정했어도, 그 역시 결 국 삶을 갈망한 탓이다. 희서가 가르쳐준 것처럼, 그리 이끌어준 것처럼. 해 바라기 향이 그의 코를 스쳤다. 세계가 몇 번이고 무너져도 괜찮았다. 그 중 심에 희서만이 남아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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