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영광
Story of 쟝 올슨 ✕ 범희서
01 -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이제 겨우 비상하는 법을 배웠을 뿐인데요.
시월의 초입, 하늘 끝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노을이 길게 땅거미를 그리고 있었다. 고작 오후 다섯 시밖 에 되지 않았는데도 푸른 하늘을 모는 노을이 솟아오르는 것이 점점 빨라지고 길어지는 어둠을 실감 나게 했다. 여름의 더위를 한 꺼풀 걷은 바람은 제법 낮은 온도를 품고 추위를 타는 이들의 살을 간지럽혔으며, 어제부터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둘 카디건이나 트렌치코트를 꺼내어 입기 시작했다.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는 점점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른 성장을 한 잎새 몇 개는 벌써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기도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은 일사량이 적어진 탓에 까만 실루엣으로 보였 고, 놀이터의 시소에 녹색 마카 펜으로 그린 하트 낙서는 완전히 검은 선처럼 보였다. 기실 주위의 풍광보다도, 어젯밤 침대에서 자신에게 속삭이던 희서의, 이제 정말 가을이야. 하는 말이 크게 다가왔던 것에 가깝겠지만....
쟝 올슨은 그러한 풍광들을 한 차례 눈에 담고 털레 털레 걷던 참이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포장되지 않은 길에서 작게 흙먼지가 일었다. 어딜 다녀왔느냐 하면 그가 예전부터 종종 들르던 엘라이자의 꽃집이 되시겠다. 좋아서 들렀다기보다 그 집을 제하면 갈 곳이 없어 갔던 것에 가까웠지만, 어째선지 그런 생활에 도 점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정말 뿌리려고요?” “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요.” 이것이 쟝이 엘라이자와 나눈 몇 분 전의 대화였다. 귀가하는 그의 손에는 해바라기밭에 뿌릴 비료가 들려 있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해바라기가 지고야 말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며칠을 더 자신의 옆에 머무르게끔 하고 싶은 요량이었다. 결국엔 보내 주어야 할 아이들을 더 살려 무엇하냐고 타박하면서도, 엘라이자는 통 크게 영양제와 비료를 통 크게 반값으로 깎아주었다.
‘음,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야....... 희서 말처럼.’
쟝 올슨은 언젠가 범희서와 함께 들렀던 꽃집에서, 희서가 꽃집 주인이 좋은 사람이라 잘 되었다며 자신의 등을 때리며 웃었던 일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잘 모르겠다고(이렇게 이야기하면 볼멘소리를 들을 게 뻔하지만, 그 당시의 쟝은 꽃집에서의 일화보다도 희서의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생각했지만, 오늘의 친근함을 보아하니 희서가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던 쟝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해바라기들도 따뜻한 마음에 감동할 거예요!’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감동한다면, 몇 달 아니 며칠이라도 더 살아 주면 좋을 것을. 실상은 비료를 아무리 뿌려도 그대로겠지. 시시콜콜한 생각과 함께 쟝은 집의 정문에서 시계방향으로 걸어 정원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짹짹거리며 정원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참새 한 무리는 쟝의 발소리에 포르르 날아올랐다. 줄곧 미뤄왔던 일을 해야만 하는 날이라 희서는 이른 오전부터 자리를 비운 채였다. 금방 돌아올 테니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미안하다며 몇번이고 입맞춤을 선사하고 가긴 했다만, 희서의 부재 덕에 본디 두 사람의 소리로 채워졌어야 할 집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무상함을 달래려 눈을 감고 시작한 허밍도 곧 희서 가 자주 외웠던 멜로디라는 사실에 다다르자 훅 불어 꺼진 초처럼 사그라들었다. 축 처진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자 애꿎은 비료 봉지만이 손안에서 눌려 바스락거렸다. 작게 벌린 입술 새로 긴 숨이 나왔다. 괜히 아랫입술이 간질거렸다. 정말로 가을이라며, 어떤 지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희미한 한기를 품은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줄곧 하늘에 정지해있던 구름이 훅 밀려갔다. 보내 주어야 할 것을 보내고 미래를 기약하는 행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쟝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쟝이야말로 시간을 어떻게 소비해야 잔인함을 느끼지 않는지, 찰나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소소한 삶의 지혜들을 자신에게서, 주위 사람들에서, 그리고 희서에게서 배웠으니까. 그러나 종종 생각의 속도는 지나치게 빠르고 마음은 지나치게 과거에 안주하기를 원해, 두 가지의 속도는 완전히 맞지 않곤 한다. 생각, 감정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까지. 자신은 아직 세 가지를 아우를 성숙함은 갖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또는 아직도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했거나.
셔츠의 칼라가 바람에 들려 나풀거렸다. 쟝은 그 모습이 언젠가 희서가 입었던 원피스의 리본이 나부끼는 모양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
윤활제를 뿌리지 않아 녹슨 경첩이 삐걱대는 정원 문에는 쟝과 희서의 이름을 차례로 적은 나무 팻말이 달려 있었다. 이 집에 처음으로 이사를 온 날 만든 팻말이었는데, 자신은 이러한 것을 손수 만드는 편이 아니니 중간에 거대하게 분홍색 하트를 그려 넣은 이 팻말도 희서의 제안이 촉발된 결과물이었다. 앞으로 자신들이 오래도록 함께 살 집의 정원이라면 분명 여기는 쟝이 자주 들러 살피고 기분을 달랠 곳이 되겠으니, 그와 자신의 이름을 둘 다 넣어야 문을 열 때마다 기분이 더욱이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귀엽고 활기찬 제안이었다. 범희서 하는 이름 옆에는 귀여운 고양이가, 쟝 올슨 하는 이름 옆에는 마찬가지로 귀여운 곰이 그려져 있 었다. 문을 열며 쟝은 어쩌면 이 팻말 덕에 이곳에서 지내는 몇 년간 자신이 ‘그렇게까지’ 우울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02 – 나는 바람에 대항하는 법도, 폭풍에 맞서는 법도 몰라요.
“희서 씨!”
“... ... ...앗, 네!”
“괜찮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하하... 아니에요, 그냥 이제 진짜 가을인가 싶어서요.”
“갑자기? 희서 씨도 실없긴.... 그래서, 갈 거야?”
희서는 높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말은 없어도 하늘은 정말로 높아진 느낌이었다. 간혹 흘러가는 구름의 크기는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았다. 몸체를 기울인 비행기가 날고 있었고, 그 그림자의 끝에 걸린 것은 붉게 떨어지는 해, 그리고 그 아래의 해바라기밭이었다. 오전부터 정신없게 일정을 채운 바쁜 일이 끝날 때가 되자 자연히 쟝의 얼굴기 겹쳐 보였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정원에 가 있겠지. 함께 있어 줬어야 했는데, 작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무룩해진 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주변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희서는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도 해가 다 질 때쯤에야 희서는 정원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곧이어, 짝! 손바닥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바로 집에 가 봐야 해서....”
“어머, 정말? 급한 일이라도 있어?”
“네,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기다리는 사람? 으흠.......”
동그랗게 눈을 뜬 희서의 지인은 곧 그의 멋쩍은 웃음에 부드럽게 눈썹을 까딱였다. 그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남자친구?’ 찰떡같이 입 모양을 알아본 희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희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딱 이번만 놔 주는 거야. 집 가면 연락하고!”
“네, 감사합니다!”
유쾌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희서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곧장 몸을 돌렸다. 손목에 건 시계는 벌써 오후 다섯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이 원래부터 이렇게 조경에 신경 을 썼던가, 또는 쟝과 이런저런 교류를 시작하던 때부터 유달리 해바라기가 희서의 마음을 비집고 폈기 때문인가. 집으로 향하기 위해 걸어가는 길마다 줄지어 서 있는 해바라기가 눈에 띄었다. 다만 그것들은 시들 때가 되었는지 하나같이 완전히 빳빳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금일 아침의 기억이 희서의 머리에 스민다. 괜히 쟝 몰래 해바라기의 줄기를 쓰다듬으며 오래 살라고 속삭였던 자신과 애틋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맥이라곤 죄 빠졌던 해바라기들을.
지금의 범희서를 구성하는 것은 미래요 삶이요 그리고 쟝과의 시간이었다. 희서는 기억한다. 삶의 의욕을 피부로 느끼기 전 희서를 구성하던 팔 할은 지독한 권태와 초연이었다. 무언가 무거운 공기가 자신을 누르다 못해 자신의 몸에 파고드는 느낌. 감각을 떨칠 수 없어 받아 들이다 보면 언젠가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고 나른한 몸은 움직일래야 움직이지 않는 일이 다 반사였다. 억지로 졸음을 참는 법을 택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깨어있을 때 달리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몸은 완전히 대부분을 자고, 간혹 먹는 둥, 안 먹는 둥 입안에 들 어오는 식사를 받는 기계적인 행태에 적응했다. 그러나 무기력이 버거운 만큼 삶도 꽤 버거운 것이라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다 또 눈꺼풀을 건드리는 졸음을 품에 안자면 하루고 이틀 이고 훌쩍 시간이 지나 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흘러가는 삶도 구태여 의미를 부여한다면 삶이겠으나...... 당시의 마음은 지금에 와서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하고 아득한, 어떠 한 장막에 가까운 것이지 가치 있거나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었다. 요지는 희서가 미래를 개척하는 삶이 아닌 주어진 미래를 받기만 하는 삶이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를 여실히 느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이끌어 준 사람은 쟝이었다. 처음 그가 해바라기밭을 보여주었을 때, 희서는 노을 속에서 웃는 그를 보며 자신의 선의가 얼마나 큰 보답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에 관해 절절히 느끼고야 말았다. 따뜻한 마음이라는 개념이, 단어로는 감히 전부 녹이지 못 힐 사랑스러움을 담고 있다는 것도, 희망이 무엇인지도. 누군가 희서에게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묻는다면, 희서는 자신을 일으킨 곳이 쟝의 해바라기밭이라고 답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끌고 공들여 가꾼 해바라기밭을 보여준 그는 한 번도 기억되지 않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희서는 그 순간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순간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회상해보면 두 사람의 바다 여행도 아마 그즈음부터 시작 되었었을 것이다. 우리 겨울이 오면 바다에 가자. 겨울에 들이치는 파도가 그렇게 예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풍경을 너와 함께 보고 싶어. 너와 간직하고 싶어. 그런 마음들이 두 사 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순간마다 희서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에게 있어 바다 여행은 마냥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가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주고 나아가 서로가 서로의 특별한 순간이 되고프다는 자그마한 욕심이었다. 여러 일에 치여 한 번도 만들 수 없던 둘만의 순간을 오롯하게 서로에게 소비하자고. 나중에 물이 그리워지고 겨울날의 바다가 그리워지면, 이번에는 여름 바다에 가자고. 소라를 들고 서로에게 파도를 속삭일 수 있을 테니까. 꽃을 단 밀짚모자를 쓰고 백사장을 거닐자. 바다는 푸르고 햇볕은 쨍하니까 새하얗고 얇은 옷이 좋겠어......
‘으으음, 어떻게 달래줘야 좋지....’
하나둘 켜지는 조명에 희서의 그림자도 하나에서 두 개로 늘었다. 그러는 동안 희서는 핸드폰을 들어 생각날 때마다 기록해 두었던 핸드폰 메모장 속의 여행지 리스트를 열어보았다. 집과 둘의 정원이 가까워질수록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주황색 안광이 반짝이는 눈이 위 에서부터 아래로 장소를 훑다가, 단어 하나를 시야에서 낚아챘다. 해바라기 산장.
03 - 「당신도 정말 겁쟁이예요. 뭐 어때요?」
“쟝!”
“아, 희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끼익, 조금은 급하게 정원의 문이 열렸다. 가방도 벗지 않고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난 희서에 쟝은 입을 한 차례 뻐끔거렸으나, 이윽고 잠잠해졌다. ‘아휴, 그럼 그렇지.’ 단번에 쟝의 기 분을 알아챈 희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장의 옆에 금방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는 옆으로 다가오는 희서를 바라보다가도 곧 잠잠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늘 말단에 뜬 해가 만든 그림자 사이로 해바라기 잎 두어 개가 떨어져 있었다. 채 떨어진 것을 보지 못한 탓에 끝부분을 밟아 잎의 끝에는 흙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애정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별 것 아닌 일이겠으 나, 쟝에게는 언뜻 처참한 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벌써 애들 기운이 빠졌네... ...비료는?”
“영양제도... 줬어. 음.... 기운을 차릴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아?”
“응, 뭐.......”
쟝이 슬그머니 희서의 시선을 피하며 뒷목을 쓸어 만졌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파악하지 못하는 침체감, 그러나 희서만이 눈치챌 수 있는 쟝의 사인이었다. 눈앞의 해바라기들은 희서가 걸어오면서 본 길가의 해바라기들보다는 덜해도, 확실히 생기를 잃고 있었다. 언제나 사랑하는 것을 바란다면 평생토록 지지 않고 해를 향해준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이야기도 섣불리 꺼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희서는 살금살금 쟝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쟝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이렇게 해바라기 돌보기에 온 정신을 쏟는 모 습도 단순한 생장의 욕구보다 자신과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과의 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기꺼이 자신이 그 침체를 보듬어줘야 할 것이다. 희서가 쟝의 손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자 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곧 해바라기에 파묻혔던 정신이 희서의 체온으로 탄력 있게 돌아왔다. 끔뻑,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 뒤로 한참이나 시선을 맞추던 희서는 씩 웃으며 쟝에게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짠, 집에 오는 길에 이걸 봤는데! 우리 내년 여행은 여기로 갈까, 쟝?”
“......여행?”
그제야 희서의 핸드폰 화면을 본 쟝이 천천히 여행 소개지의 맨 위에 적힌 글자를 읽었 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세요, 안락하고 따뜻한 자연, 도심에서 벗어난 힐링이 가능한 해바라기 산장.’ 아래의 사진에는 통나무로 만든 큰 집과 언덕 두세 개를 흐드러지게 채운 해바라기밭이 늘어져 있었다. “여기는...... 일부러 찾아준 거야?” “응, 당연하지? 쟝이 좋아할 곳에 가고 싶어서 찾아봤어. 전에 담아놨더라고.” 해사하게 웃는 희서의 모습을 보던 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애석하게도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동하던 마음도 잠시, 하필이면 시월의 희서가 보여 준 여행지가 해바라기 산장이라는 사실이, 설마 자신의 노골적인 우울을 눈치채서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쟝이 괜히 희서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희서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쟝이 잠잠하게 도리질 쳤다.
“...매번 신경 쓰느라 힘들지 않아?”
곧이어 허공을 때린 음성은 아주 조심스러웠으며, 아주 조용했다. 이것은 우울의 전염이 라기보다는 단어 그대로 배려였고 망설임이었다. 동시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하는 메시지를 담은 말. 제아무리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안다고 해도 종종 이러한 걱정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쟝은 동의한다. 언젠가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넘겼던 토크쇼에 서 나온, ‘사랑하는 정도와 관계에서의 확신의 정도는 반비례한다’라는 말도 어느 방면으로는 적절한 말이었다. 사랑의 약함이나 쉬이 깨질 사랑을 걱정하는 단계는 지난 지 오래되었으나, 쟝은 좋아하는 마음을 더 타오르게 할지언정 그것에 물을 뿌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 았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감추고픈 약함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처럼 무심코 마음을 놓고 희서를 대할 때면 묻어두었던 걱정은 고개를 치들곤 하는 것이다.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에 희서가 쟝을 톡 건드렸다.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에도 잡은 손 틈새로는 바람이 스미지 않았다. 그가 쟝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주 잡은 손을 살살 흔 들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 “전혀.” 짧은 대답은 간결할지언정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희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거나 하는 에두른 대답을 내놓아 쟝을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쏟는 관심과 애정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람. 사랑받고 있음을 심적으로나 표면으로나 확신하도록 만들어주는 세심한 사람. 그 모든 과정에서 생색도 자랑도 하지 않는 진실된 인물. 쟝이 모두를 믿지 못할지언정 그에게 자신의 모든 면을 내어준 건 한결같이 세심한 사랑에서 기인된 자신의 표현이었다. 해바라기 씨앗과 곰인형, 자신을 향한 미소와 격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노을은 하늘에서 몸을 물렀다. 이제 하늘은 노을의 꼬리를 물고 어둠을 품어 온몸을 장식하고 있었다. 희서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 아래쪽으로 쟝을 잡아끌었다. 체중이 실리자 자연히 쟝의 몸이 아래로 이끌려 내려갔다. “귀 대 봐.” 희서가 소근댔다. 쟝은 희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어쩐지 마음 안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있잖아, 내 생각에는.......”
04 - 「그 누구도 처음부터 수월히 나는 법을 알고서 태어나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소리가 울리는 순간이었다. 속삭임이 끝나자 쟝이 눈을 크게 뜨고 희 서를 바라보았다. 해바라기가 쟝한테 고마워서 내년에 더 예쁘게 필 준비를 하는 것 같아. 그 러려면 힘을 아껴둬야지. 왜냐하면, 내가 오는 길에 있던 해바라기들은 벌써 얘들보다도 축 처져 있었는걸....... 분명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말은 아니었으나, 이 말은 쟝의 어딘가를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희서의 말은 그가 해바라기를 꽃 피우기 위해 매년 묵묵히 노 력하는 모습을 감싸 안아줬고, 다음으로는 결실이 시듦으로 이어질 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격려였던 것이다. 가만히 희서를 바라보던 쟝이 비로소 부스스 웃음을 품었다. 곧 그는 완전히 몸을 틀어 양팔을 벌렸다. 희서의 몸이 그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쟝의 팔이 희서의 어깨와 등을 끌어안은 탓이었다. 한 몸 가득히 따뜻한 체온이 엉겨 붙었다. 기분 좋은 전염이었다. 희서가 눈을 크게 뜨다가, 웃으며 쟝의 품에 천천히 파고들었다. 그의 흰 티셔츠의 희서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고마워.”
쟝의 삶에 있어서 희서는 자신의 긍정을 담당하는 회로와도 같았다. 비록 지금의 자신이 클론에 불과할 뿐이라도 말이다. 삶의 이유를 잃었었던 과거부터 온갖 권태나 우울함에 잠식 했을 때마저도, 희서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가 기억하는 순간보다도 오래. 아름다운 해바라기를 한가득 심고 그것들이 개화하는 것을 지켜보며 남몰래 웃음을 짓는 버릇도 그날의 희서가 자신의 손에 쥐여준 해바라기 씨앗을 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행복의 열쇠이자 길이 되는 셈이다. 한없이 애정을 베풀어 줄 것만 같은 존재는 언제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만은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니, 어떻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겠나. 다만 그 덕에 돌아오는 선의도 한없이 이어져도 끊이지 않는 사랑스러움도 알았으니, 피부로 느낀 감사를 또한 희서가 아주 사랑스러워할 방식으로 돌려주어야 할 테다. 올해를, 내년을, 앞으로를 전부 할애해서. 나의 시간과 나의 주의는 모두 당신에게로 쏟아진다고.
쟝은 여전히 희서를 품에 안고 자주 잡아 가운데의 색이 바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는 다시 그들의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보다도 고개를 푹 숙인 해바라기들이 일렬로 심겨있는 것이 보였다. 일 년 내내 떠 있는 해라면 지는 일도 없어야지, 그러나 사시사철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은 한없이 바라기엔 말하지 못하는 식물이라도 해를 입히는 모양이라고, 자꾸만 비관적으로 다가오던 생각은 일순에 고쳐졌다. 희서의 말대로 갈 때가 된 것이겠다. 덧대어 잠깐의 이별은 결코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었고. 말하지 못하는 식물도 애정을 느껴왔고 언제나 자신의 방식으로 화답해 왔음이라. 사랑은 주고받는 한 끊기지 않는다. 비록 그 속도가 느리더라도.
희서와 쟝의 사랑이 이어지는 것처럼 해바라기도 자신들의 곁에서 이어질 터였다.
노랗게 타오르면서, 눈부신 생애와 생장을 장식하면서.
부드러운 밤이, 또 한 번 그들의 터전에 이불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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